본 체험수기는 와타나베 의원과 손태경 원장이 한국의 니시의료기관들을 통해 임상 및 지도한 분들의 체험사례의 일부입니다.
와타나베의원 암 & 난치병 체험사례 (질병명) | ||||||||||||||||||||||||
암 관련
위암, 위 폴립, 직장암, 자궁암, 자궁암과 당뇨병, 유방암&유방암 수술 후 전이 및 재발, 폐암, 간암, 치료불가능의 뇌종양, 골수성 백혈병, 피부암, 전립선암, 임파육종, 악성림프종, 췌장암..... 전체 암의 비수술적 치료, 현대의학적 치료(수술&항암&방사선) 후 전이 및 재발방지 치료에 50년간 수많은 치료사례의 성과를 내고 있음
난치병, 불치병
과도한 비만증과 고혈압, 난치성 고혈압, 고혈압과 만성심부전, 식도종양과 고혈압과 협심증, 고혈압과 당뇨병과 만성신염, 고혈압과 심근장해, 뇌출혈, 뇌경색. 뇌연화증, 뇌일혈, 뇌동맥류에 의한 좌반신불수, 만성심부전과 비만증, 중증의 만성심부전과 고혈압, 불치의 심근경색, 심장변막증, 협심증과 만성신염, 만성관절류마티즘, 협심증과 당뇨병, 협심증과 만성비염, 난치성 협심증, 중증의 심근경색과 당뇨병, 난치성 만성신염, 어려운 네프로제(신장증), 신장결석, 난치성 혈뇨증, 만성위장병과 치질, 난치성 전립선비대증, 비만증과 위장병, 급성충수염, 만성위궤양, 기관지확장증과 만성위궤양, 만성위궤양과 심장쇄약, 만성십이지궤양, 당뇨병과 안저출혈, 당뇨병과 뇌혈전, 난치성 만성간염, 급성간염과 간비증후군, 급성간염, 만성간염과 만성위장염과 신장결석, 만성간염과 만성위장염과 약에 의한 불면증, 만성혈청간염, 난치성 혈청간염, 바이러스성간염, 만성간염과 불면증, 치유불능인 간경변증, 당뇨병과 간경변, 심각한 담석발작, 난치성담낭염, 만성담낭염과 췌장염, 소아천식, 만성천식, 난치성요통과 좌골신경통, 두통과 요통, 교통사고 휴유증, 요추연골헤르니아(탈장), 척수성강직마비에 의한 보행불능, 경추성척수증, 만성습진과 고혈압, 만성피부병, 아토피, 녹내장, 난치성난청, 만성축농증, 축농증과 고혈압, 만성중이염, 자궁근종, 자궁폴립과 근종, 난관수종과 골반복막염, 불임증, 난치성통풍과 요통, 만성통풍, 만성관절류마티즘과 고혈압, 난치성만성관절류마티즘, 난치성교원병, 간질병, 파킨슨병, 베체트병, 불치인 다운증, 정신쇄약, 만성인후두염, 가스중독, 암면신경마비, 하지정맥류,......... 와타나베의원에서는 약 50년간을 난치성, 불치성 이라고 하는 질병의 대부분을 순수 니시의학(와타나베의원치료프로그램)으로 완치 또는 호전 시키는 치료를 하고 있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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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로서 니시의학을 체험한 소감 - 여경구내과/원장 , 심장내과 전문의 , 연세대학교 의대 외래교수 | ||||||||||||||||||||||||
안녕하세요 . 손 원장님 . 태풍이 지나고 난 후부터 가을이 성큼 다가옴을 아침 , 저녁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 예전엔 " 이제 가을이 오는가 보다 …" 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 이제는 " 풍욕 하기에 좋구나 " 라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을 보니 저의 생각과 기준도 어느덧 많이 변하였음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 또한 지난 토요일부터 식탁에 나오는 음식의 색과 맛이 바뀌어 짐을 보면서 교육의 힘과 인식의 변화가 많이 되었음을 몸소 느끼게 됩니다 . 이 모든 것이 원장님의 배려와 가르침 덕분이라고 생각하고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 그리고 이렇게 좋으신 분을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 요즘 생각해 보면 하루아침에 제가 니시 의학을 아주 긍정적이고 호감있게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 개업을 하면서 만성 질환들과 여러 종류의 암과 알레르기 병들이 점점 늘어가지만 , 특별히 해 줄 것이 없는 것을 답답히 여기다가 면역을 증가하는 것이 가장 최적의 방법이라고 나름대로 생각하였습니다 . 그래서 비타민 치료 , 태반주사 , 한방의 침이나 부황 , 뜸에도 관심을 갖던 중 니시의학이 생활 전반, 식사 , 행동 , 운동에 걸쳐 가장 기본이 된다고 생각되었습니다 . 결국 면역 강화라는 목표 설정은 하였지만 뚜렷한 전략 전술이 없어 고민하던 차에 너무나 귀한 치료 방법을 그것도 아주 자세하게 배우게 되어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 퇴원 후 저의 아내 양 원장과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관해 주말 내내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 특히 선생님께서 직접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러주신 것에 대해 너무 인상적이고 좋았다고 합니다 . 그리고 앞으로는 이런 치료를 하는 병원이 꼭 필요하다고 강조하였습니다 . 그래서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 사람이 계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실 수 있도록 먼저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고 전도를 위한 선한 목표와 뜻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가장 좋은 때에 주님께서 좋은 것으로 주실 것으로 믿고 설레임을 갖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 원장님께서도 함께 기도해 주셨으면 바람으로 이렇게 저의 생각과 비젼을 말씀드리는 것 입니다 . 한국의 오아시스 병원을 꿈꾸며 비록 처음은 미약하지만 , 이제껏 처럼 나중은 창대해질 것을 믿으며 가슴 설레는 하루 하루를 지냅니다 . 004 8/23 여경구 拜上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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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궁경부암을 수술하지 않고 치료하다. | ||||||||||||||||||||||||
柴田智子 (여/32세) 삿뽀로시 동구 - <와타나베의원 건강신문 413호 2000.7.10> 柴田씨는 1999년 8월 28일에 와타나베 병원을 방문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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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상선 암이 수술도 하지 않고 항암제도 복용하지 않고 독특한 치료법으로 말끔히 치유되다. | ||||||||||||||||||||||||
齊藤眞智子 (여/48세) 삿뽀로시 白石區 - <와타나베의원 건강신문 432호 2002. 2. 10> 齊藤씨가 상경하여 와타나베의원에 입원한 것은 4년 전 1998년 1월 7일이다. 이미 2년 전에 갑상선종이 인식되었지만「악성세포는 아니다」라고 하여 6개월 뒤에 검진하여 경과를 보게 되었다. 1997년 12월 말의 검진결과 갑상선 암(유두선 암)이라고 진단되어 1998년 2월에 수술을 하기로 날을 잡아 놓았다. 하지만 수술도 그 어떤 것도 하지 않기로 결정을 하고 1998년 1월 7일 와타나베의원에 입원을 했다. 입원 당시에는 체중이 0.5kg 감소하여 55kg(신장 160cm)이고 매우 피곤해 보였고 자주 현기증이 일어나는 상태였다. 좌측 갑상선이 엄지 손가락 절반 정도로 팽창. 혈압(110/70). 심장비대증. 혈액생화학 검사에서 두드러진 변화는 나타나지 않음. 갑상선 호르몬 검사상「TSH 0.83(0.34~3.5), Free T3 2.64 (2.47~4.34), Free T4 1.02(0.97~1.79)」로 갑상선 기능항진도 저하도 나타나지 않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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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으로 수술을 권유 받았지만 수술을 하지않고 와타나베의원의 독특한 치료로서 경쾌한 치료를 하게되었다. | ||||||||||||||||||||||||
金田國雄 (남/63세) 東京都 八王子市
金田씨가 최초로 내원하여 진찰을 받은 것은 2000년 10월 28일 이었다. 수년전부터 모대학병원에서 폐섬유증 진단으로 치료를 받았으나 호전이 없었다. 숨이 차고 호흡곤란이 일어나며 3년 전에는 협심증으로도 어려움을 겪고 있었습니다. 2000년 8월 5일에는 각혈이 나와서 모 대학병원에 3주간 입원하여 정밀검사와 기관지 내시경 검사결과 「폐암」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선암으로 진단 받았습니다. 10월 24일 최종검사 결과 입원 수술을 권유 받았지만 수술을 받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기에 10월 28일 와타나베 의원에서 진찰을 받고 11월 13일 입원했습니다. 입원시 혈압 130/80 흉부에서는 좌측 하부 폐에 음영이 있고 EKG에도 뚜렷한 다른 변화는 나타나지 않음. 독특한 식사요법과 치료를 시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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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대장암(말기)을 수술 후, 항암제를 복용하지 않고 니시의학 치료법으로 완치하다. | ||||||||||||||||||||||||
後藤寬二 (남/49세) 山形縣 米澤市 - <와타나베의원 건강신문 403호. 1999.9. 10> 後藤씨는 7년전 1992년 4월에 복부에 종양이 있음을 느꼈다. 시내의 모 종합병원에 입원 긴급수술을 받았다. 아기의 머리만큼이나 큰 종양이 횡행 결장에 있고 게다가 이 종양은 간장과 십이지장에 유착되고, 주위의 임파선도 광범위하게 부어 있었다. 대장암으로서 주위의 복막에 전이가 되어 있는 상태였다. 병원에서는 항암치료를 하고 싶었지만 암이 전이 된 상태이기 때문에 예후는 좋지 않으며 잔여 수명은 수개월에 불과하다는 최종 진단이 내려졌다. 와타나베의원에서 니시의학에 의한 치료를 받기로 희망하여 5월 24일에 입원 와타나베의원의 독특한 식사요법과 암치료법을 받기 시작했다 입원시 체중 62kg(신장165cm) 後藤씨는 암이 발병하기 이전에는 커피를 아주 좋아해서 1일 5~6잔, 맥주 1병정도, 육식을 좋아했으며 생야채 섭취는 거의 하지 않는 좋지 못한 식생활을 해 왔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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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유방암을 수술을 받지 않고 완치하다. | ||||||||||||||||||||||||
吉田幸子 (여/48세) 삿뽀로市 中央區 北二條西二十六 - <와타나베의원 건강신문 403호 1999.9. 10> 주부인 吉田씨의 친가는 니시 건강법의 신봉자들로서 吉田씨도 산전, 산후에 부모님으로부터 건강하게 태어났으나 아버지의 등살에 못 이겨 마지못해 1주간에 1회 정도 형식적으로 니시의학을 실행하는 정도였습니다. 1974년 11월 국립병원에서 우측 유방암 진단을 받고서 와타나베 선생님의 지시로서 잠깐 동안 자택에서 니시건강법을 실행했습니다만 결국 1975년 3월부터 2개월간 입원하여 적극적인 치료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는 와타나베 원장님의 손가락 3마디가 조금 넘을 정도 크기의 응어리가 오른쪽 유방에 있고 오른쪽 겨드랑이 밑 임파선에 전이가 있어서 손을 올리기 힘든 상태였습니다. 그래도 수술을 받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폐암이었지만 니시건강법으로 놀라울 정도로 편안하게 생활하시면서 고생하지 않고 돌아가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나도 그러한 모습으로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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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의학적 치료만으로 4×6cm 유방암과 겨드랑이 임파선 2.8cm를 수술은 물론 현대의학적 치료를 일절하지 않고 완전히 없에버리다. | ||||||||||||||||||||||||
김○○ (여/50대 중반) 부산 거주 - <와타나베의원 건강신문 403호 1999.9. 10> 딸의 혼사에 지장이 있을 지도 몰라서 대략적인 내용만 기록하고자 합니다. 현재 니시통합의학연구원 부원장이 와타나베 의원에 재직 중일 때 입원 치료했던 많은 한국 환자 중의 한 분입니다. 2000년 2월에 제가 다니던 교회의 장로님이 고혈압(190/110), 만성심부전, 만성 C형간염으로 2개월간 입원치료를 한 후 건강을 되찾은 것을 계기로 같은해인 2000년도 하반기에 와타나베 의원에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입원 바로 직전에 부산 일신기독병원 일반외과 과장님으로부터 수술→항암치료→방사선치료를 권유 받았지만 거절하고 나름대로 니시의학에 대한 확신과 신앙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입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초 남편과 함께 2주간을 입원한 후 결과는 유방의 응어리가 부드러워졌고 겨드랑이 임파선도 가벼워 졌다는 것 또한 체력과 컨디션이 많이 좋아졌다는 것을 깨닫고 15일 비자였기 때문에 귀국 후 재차 입원하여 2개월간 열심히 치료에 임한 결과 유방암이 4×6cm⇒2.8cm로, 임파선이 2.8cm⇒1.2cm로 줄어든 것을 확인하고 와타나베 원장님과 상의 후 퇴원하기로 하고 자택에서 열심히 배운대로 하면 완치될 수 있다는 말씀에 한국으로 돌아온 후 신앙생활과 함께 최선을 다했습니다. 암은 점점 줄어들었고 평소 과식, 단 음식, 기름진 음식을 너무 좋아해서 비만이 되었고 말 그대로 너무나 좋지 못했던 식?생활습관이 암의 원인이었던 것을 깨달은 후 많은 후회와 함께 적극적으로 개선을 해 나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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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발성 폐암 말기였지만 니시의학으로 극복하고 스트레스와 정신적인 고통에서 벗어나 들겁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다. | ||||||||||||||||||||||||
박영희, 여, 56세, 주부 1998년 1월 고신의료원에서 우측 폐암(1.5cm 단일병소)에 대해 폐엽 부분절제술을 하고 2002년 8월 전이 발견되어 항암치료 권유받았으나 중국 목단강 북방병원에서 "개입술" 시술을 받고 9월 CT결과 좋아진 것이 확인되었으나 11월 CT상 우측 및 좌측 다발성 폐암이 발견되어 자연식품으로 자가치료를 하던 중 2003년 3월 CT상 악화되어 2003년 3월 26일 ~ 2003년 4월 15일 니시의학적 피료를 하였습니다.오른쪽 폐암진단을 받고 수술을 한 후 항암치료 권유를 받았으나 거부하고 2002년 8월 중국 목단강 북방병원에서 개입술이라는 시술을 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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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두암 및 간 전이를 니시의학으로 극복하고 암으로부터 회복 | ||||||||||||||||||||||||
장희숙. 여. 47세. 부산. 주부 2004년1월16일 부산대학병원에서 비인두암 및 간 전이 진단과 수술불가 판정으로 항암치료를 권유받았습니다. 2004년 2월 20일 장희숙님의 지인께서 일본 와타나베 의원에서 암을 극복한 형제의 예를 들면서 니시의학을 소개해 주셨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확신을 가지고 입원을 하였습니다. 하지만 며칠 뒤 대학병원측의 항암치료의 권유와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인해 병행치료를 하기로 결심하고 2차 항암치료를 했으나 3차 치료 후 백혈구와 혈소판 수치가 현저히 감소되었고 체력이 점점 약해지는 부작용으로 인해 이후 모든 항암 치료를 거부하고 곧바로 체력회복과 면역증강에 주안점을 두고 니시의학적 치료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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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치료를 중단하고 니시의학적 치료로서 암을 극복하고 새 삶을... | ||||||||||||||||||||||||
최환수, 남, 33세, 대구 보통의 대장암 환자와는 달리 평소 육식보다는 채식을 좋아했고, 술과 담배는 일절 삼가해 왔으며, 특별히 변비나 설사 증상도 없었고 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아주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대장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하늘이 무너지는 듯 했습니다. 아내와 어린 자식을 생각하니 정신적으로 상당한 혼란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밀어 닥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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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성 임파종을 극복한 한국 남성 | ||||||||||||||||||||||||
K. S.씨, 당시 69세 1991년, 목 오른쪽에 종기가 발견되어 악성 임파종으로 진단되었다. 대학병원에 입원하여 항암제에 의한 화학요법을 받았지만 머리카락이 빠지고 전신 권태감이 강하여 치료를 그만 두고 퇴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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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로이드제를 끊고 성인형 아토피가 치유 | ||||||||||||||||||||||||
S씨, 21세, 남성 고교 3년의 여름부터 얼굴이나 손바닥에 습진이 나타나고, 심한 가려움도 동반한 S씨는 집 근처의 피부과에서 성인형 아토피성 피부염으로 진단되었다. 그래서 스테로이드 연고를 사용하였던 바, 일시적으로 증상이 경감했지만, 곧 재발을 되풀이하여 차차로 증상이 악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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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로이드제를 끊고 아토피 치유 | ||||||||||||||||||||||||
T씨, 26세, 여성 T씨는 어릴 적부터 아토피성 피부염에 걸려, 스테로이드 연고로 그 증상을 억제해 온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20세를 지나고부터 증상이 악화하여, 스테로이드 연고를 사용해도 증상이 경감되지 않기 때문에 내 의원(일본 와타나베의원을 말함)을 찾아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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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제를 거부한 츠지 에이코씨 | ||||||||||||||||||||||||
츠지 에이코씨, 당시 67세, 여성 츠지 에이코씨(67세)가 결혼하셨을 때 이미 남편은 니시 건강법을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츠지씨도 눈동냥으로 냉온욕을 해 보았습니다만 당시는 그런대로 건강했던 터라 지속은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때 니시 건강법을 알게 되었던 것이 약 40년 후에 츠지씨의 생명을 구하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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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거부하고 니시 건강법으로 암을 극복한 이병용씨 | ||||||||||||||||||||||||
이병용씨, 당시 62세 저는 올해 62세 되는 이병용이라는 남성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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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병과 비만을 치료한 미쯔이 쥰씨 | ||||||||||||||||||||||||
미쯔이 쥰씨, 당시 70세, 남자 한천단식과 니시의학 건강법으로 심장병과 비만을 치료하여 남은 여생을 즐겁고 건강하게 보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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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경색 후유증(좌반신 마비)을 고친 최덕만씨 | ||||||||||||||||||||||||
최덕만씨. 69세. 남. 부산. 내과 전문의 뇌경색 후유증(좌반신 마비)을 고치고 건강해져서 운전과 진료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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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에서 행복한 하루 하루가 된 전정금씨 | ||||||||||||||||||||||||
전정금씨. 여. 54세. 안양. 주부 니시의학과 아봐타 프로그램을 통해 절망에서 행복한 하루 하루가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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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의학의 한천단식 프로그램과 식생활 개선으로 인해 체중 12Kg 감량 및 체지방 8%, 내장지방 감소와 숙변완전 해소 | ||||||||||||||||||||||||
유○○. 여. 17세. 부산. 학생 여고생인 저는 162cm의 키에 체중 74.8kg. 체지방 40.4%로 피부는 거칠었고 군데군데 여드름이 많았습니다. 또한 평소 학업 중에는 자주 피곤함을 느꼈으며, 심한 편식 및 과식과 폭식의 불규칙한 식습관 등으로 특별히 뾰족한 방법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었습니다.
집과 병원에서 1개월간의 프로그램을 실행한 결과 점점 숙변이 배출되어 피부는 많이 좋아지고 몸도 날아갈듯이 가벼워졌으며, 특히 공부할 때 피로감이 많이 줄어든 것으로 미뤄보아 집중력이 향상되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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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병이었던 아토피성 피부염을 치료하고, 우울증과 악몽으로부터 벗어나다!! | ||||||||||||||||||||||||
박 ○○. 25세. 여. 부산. 음악학원 강사 저는 어릴 때부터 아토피성 피부염에 걸렸으나 20세가 넘고 나서 그 증상이 악화되어 스테로이드 연고를 사용해도 증상이 나아지지를 않아 韓日클리닉을 찾아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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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치인 베체트씨병이 니시의학으로 낫다 | ||||||||||||||||||||||||
홍은영. 여. 40세. 부산. 「만화로 보는 그리스 로마신화」 작가 저는 2000년 8월 모 대학 병원에서 베체트씨 병으로 진단받았으며, 혀와 생식기 부위에 궤양이 생기고 집중력의 저하로 인해 무기력하고 피곤하며 시력 상태도 좋은 편이 아니어서 쉽게 눈이 피로해지는 전형적인 베체트병의 증후로써 치료를 받았지만 쉽게 호전되지 않아 병세가 더 악화되지 않을까 대단히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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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마티스 관절염을 약에만 의존했지만 니시의학 치료로서 약을 끊고도 통증없이 건강하고 즐겁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 ||||||||||||||||||||||||
김갑선. 여. 71세. 대구 나이가 많아 퇴행성과 겹쳐 류마티스 관절염을 계속 앓아 왔으나 약으로만 통증을 줄일 수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습니다. 계속적으로 약물 치료를 하다보니 위, 장 등의 소화기관에도 문제가 생겨 입맛도 떨어져서 점점 식사도 제대로 못하게 되고 잦은 설사로 인해 약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악순환과, 밤에는 통증이 있어 잠을 못 이루어 급기야는 우울증까지 생겨 하루하루가 괴로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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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의학 건강법으로 항암치료 후유증에서 벗어나다. | ||||||||||||||||||||||||
이향옥. 여. 44세. 싱가포르. 여행사 경영 2003년 3월 서울 강남 성모병원에서 침습성 유방암 판정을 받고 왼쪽 유방을 절제한 후 항암치료를 받았으나 그 부작용으로 생리가 나오지 않고 탈모현상에 정신적 우울증 등의 심각한 후유증이 뒤따랐습니다. 지인을 통해서 韓日클리닉을 소개받고 입원을 결심했으나 싱가포르에서 여행사를 직접 운영하는 입장이므로 오랫동안 치료받을 시간이 없어서 3주간의 입원기간을 계획하여 치료를 시작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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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괴롭혀 왔던 아토피를 고치고 체중감량도 5.5kg!! | ||||||||||||||||||||||||
이○○, 여, 22세, 대구, 대학생 잘못된 식생활과 생활습관으로 고교시절과 대학생활을 해오고 있었지만 정말 주위 친구들의 음식문화에 혼자서는 별도의 좋은 프로그램을 가진다든지 가려서 먹는다든지 하는 것은 좀처럼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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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토피성 피부염으로 10년동안의 고통과 정신적 스트레스에서 벗어나 새 삶을 찾다. | ||||||||||||||||||||||||
박○○, 여, 60, 부산 젊었을 때부터 알레르기 체질로 불편함이 많았는데 점점 나이가 들면서 피부기능이 약화되고 남편이 유명한 패션디자이너인 터라 매장에서 고객과의 대인관계로 인해 스트레스가 심했고, 식탐이 있고 단 음식을 좋아하는 식습관 등의 종합적인 결과로 아토피성 피부염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갔습니다. 게다가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는 방치한 채 현대의학적인 약물 및 주사요법에만 매진하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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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시의학이 내게 놀라운 행복을 주었다. | ||||||||||||||||||||||||
○○○, 70세, 남 저는 성남에서 내과의원을 하고 있는 의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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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학과 니시의학의 적절한 병행으로 암은 물론 당뇨병과 고혈압까지 말끔히 없애버리고 희망과 기적의 하루하루를 살다 | ||||||||||||||||||||||||
상종수. 남. 61세. 부산 어느 날 목 부근이 붓고 약간씩 통증이 있는 듯해서 검사를 받기로 하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진단결과인 인후암 3기 판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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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암제 복용을 중단하고 니시건강법으로 암을 극복한 나루사와 쿄코(成泥京子)씨 | ||||||||||||||||||||||||
나루사와 쿄코(成泥京子)씨 나루사와 쿄코씨가 컨디션의 나쁨을 느끼게 된 것은 헤세이 3년(1991) 초기 무렵이었습니다. 나날이 악화되는 것을 느끼면서도 무심코 병원에 가는 것이 늦어져 이대로는 안되겠다고 병원에 뛰어들었던 것이 4월. 그리고 자궁경부암의 선고를 받았던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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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병(難病)인 피부근염(筋炎)을 완치 | ||||||||||||||||||||||||
아키다 현 혼죠우 시 나카카타 마치카토오 리에코 (49세) 와타나베 선생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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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질병이었던 아토피성 피부염을 완치하고, 결혼해서 건강한 아이 출산 | ||||||||||||||||||||||||
야마나시 현 코우후 시, 스기타니 사유리(26) 스키타니 씨는 어릴 때부터 아토피성 피부염에 걸려, 스테로이드 연고로 그 증상을 계속해서 억눌러 왔습니다. 그러나 20세가 넘고 나서 그 증상이 악화되어 스테로이드 연고를 사용해도 증상이 나아지지를 않아 와타나베 의원을 찾아왔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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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방식을 바꾸고 매일 "모관 운동"을 꾸준히 하여 심근경색 완치 | ||||||||||||||||||||||||
토쿄 도, 하기와라 히사에(61세? 주부) 운동을 좋아하던 제가 설마 심장박작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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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천 단식을 계기로 체중이79kg에서 69kg으로, 고혈압, 갑상선 기능 저하, 관절통 등 몸이 좋지 않은 곳도 모두 나았습니다. | ||||||||||||||||||||||||
미야시로 현 호텔경영. 타카하시 히데코(66) 비만에서부터 몸 여기저기가 좋지 않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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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레스테롤, 중성지방, 고혈압이 한천 단식으로 저하되고 체중은 6kg감소, 피로, 권태감이 풀리고 머리도 몸도 상쾌하게 | ||||||||||||||||||||||||
치바 현 회사원. 이나다 미츠테루(41) 업무의 피로라고 얕잡아 보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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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주간의 아토피 치료 & mind 힐링 | ||||||||||||||||||||||||
정○○. 여. 22세. 서울. 대학생
아토피는 어릴적부터 앓았는데 본격적으로 고생을 한 것은 1년 반 전 스테로이드를 끊고 나서부터였다. 스테로이드 부작용으로 온 몸에 진물이 흐르는 고통스러운 시기를 보냈다
그러다 니시 의학을 접하고 마더즈 힐링 센터를 알게 되었다 입소 전 그 동안의 각고의 노력으로 고비는 모두 넘기고 회복기에 들어간 후 였으니 귀, 얼굴, 목에 진물과 갈라짐이 있었고 가려움과 불면도 심한 상태였다 2013년 1월 5일 이곳에 오고나서 열심히 풍욕, 냉온욕, 소형기와 대형기 운동, 마그밀 복용과 조식 폐지와 1일 2식을 실천했다 비틀린 자세가 얼마나 좋지 않은지 알게 되었고 대형기 운동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매일 냉온욕을 하러 해운대 온천에 다닌 것도 피부 상태 호전에 굉장한 효과가 있었다 규칙적인 생활로 전체적인 건강 상태도 많이 좋아졌다.
하루 일과 중 가장 좋아했던 시간은 파도 소리가 들리는 근처의 향긋한 소나무 숲길을 걷는 것이었다 해풍과 신선한 공기에 피부도 맑아 졌지만 푸른 바다를 보며 마음까지 치유되었다 이곳에 너무나도 고마웠던 것은 최대한 즐겁고 편안하게 지낼 수 있게 도와준 점이다 깨끗하고 쾌적한 시설에 매 끼 식사는 아기자기한 일본 식기에 정성스럽게 차려져 있고, 창 밖으로 바다가 펼쳐진 방에서 안락한 4 주를 보냈다 채식을 하는 점을 비롯해 나의 여러가지 까다로운 요구를 정말 감사하게도 성심성의껏 들어주시고 최대한 편의를 봐주셨다 직원 분들과 사모님읜 할머니, 언니, 엄마가 되어 눈물 날 만큼 잘 챙겨주시고 보살펴 주셨다
피부는 온 지 얼마 안 되어서부터 아물기 시작하여 한 달이 지난 지금은 몰라보게 깨끗해졌고, 가려움증도 많이 줄고 밤에 잠도 훨씬 잘 자게 되었다 4주 간 너무너무 잘 지냈고 그 동안 정말 감사했어요 너무 아쉽고... 모두모두 정말 감사드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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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암은 나에게 이런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은 아닐까?. | ||||||||||||||||||||||||
김준○. 남. 72년생. 부산. 대장암3기
삶의전환점을맞으며
2008년 12월 직장에서 건강검진을 받으면서 대장에 암이 발견되었고 1월에 대장암 수술을 하였다. 항암치료를 12회 받았고 그 후 먹는 항암약을 2년 정도 복용하였다. 모든 일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암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기 때문에 내가 어떤 치료를 선택하거나 말거나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담당 의사의 지시에 의존하여 병원의 치료가 끝났다. 그리고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으로 가정의 생계를 위해 다시 직장에 복귀하였다. 암에 대한 모든 치료는 끝났다고 하였고 암도 더는 보이지 않는다고 하여 다시 예전처럼 일상생활을 해도 괜찮다고 판단했었다. 또 의료진의 생각 도 나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덕분에 안심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 다. 암 수술로 대장과 직장을 15Cm 정도 잘라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불 편함은 있었지만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그 또한 적응해나갔다. 평온한 일상이 이어졌고 암에 대한 두려움도 무뎌져가면서 시간은 흘 러 2012년이 되었다. 연초부터 컨디션이 몹시 좋지 않아 생활이 불편할 정도였다. 자꾸 피곤하고 무기력했으며 등이 아픈 증상이 지속되었다. 혹 시나 싶은 두려움에 병원에 찾아 증상을 호소하고 PET-CT를 찍었다. 그 렇게 검사를 해봤는데도 아무런 이상이 없다고 나왔다. 몸이 안 좋은 것 이 분명했지만 병원에서 이상이 없다고 하니 그런가보다 괜찮겠지 그렇 게만 생각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그해 9월에 다시 MRI로 검사를 하였다. 그런데 골반 옆 임파선에 암이 있음을 발견되었다. 병원의 모범생처럼 주는 약 다 먹고, 주기적으로 검사도 받고, 병원에서 시키는 모든 일들을 했는데 다시 암이 발견된 것이다. 그때는 커다란 망치로 뒤통수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일단 급한 대로 직장에 사정을 말하고 방사선치료를 받기 시작했다. 총 33번의 치료를 받았다. 힘든 시간이었지만 암이란 게 쉽게 떨어지지 않는 구나 하는 생각에 암에 대한 공부를 결심했다. 물론 이전에 암을 처음 진 단 받았을 때에도 암에 대한 공부를 어느 정도 했었다. 주로 음식이나 식 품과 관련된 내용의 공부였는데 막상 재발을 하고 보니 먹는 것만으로 암 이 없어지는 식의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먹는 것뿐만 아니라 암과 관련된 철학, 종교, 또 암을 나았다는 사람들의 책도 사서 정독하였다. 하지만, 어떤 책속에도 내가 찾는 답은 없었다. 나쁜 환경, 즉 담배, 술, 스트레스 등이 암의 원인이라고 추축만 할 뿐이지 명쾌한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런 책을 돈 받고 파는 사람들이 이상했고 무슨 이야기를 책에서 하는 것인 지도 모호했다. 결국 답은 내가 찾아야만 했다. 방사선 치료 후에 담당 주치의는 수술을 권유했다. 나는 방사선 치료를 받으면 잘 해결 되리라 생각했는데 담당의사는 수술을 통해서 임파선을 제거하자는 논리였다. 남자로서 중요한 부분의 주변을 수술해야 하며 아 주 위험한 수술일 수 있지만 주치의는 수술을 통한 암세포의 제거가 가장 확실하다며 수술을 권했던 것이다. 며칠간 고심했다. 중요한 일이고 잘못 되면 남자로서의 구실도 못할 뿐 아니라 평생 장애를 안고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선뜻 결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주변에 도움을 하는데 고등학교 때 친한 친구인 의사에게 수술에 대한 조언을 구했는데 그 친구 조차도 수술을 찬성하는 느낌은 아니었다. 결국 나는 담당의사의 뜻대로 수술을 결심하였다. 12월 27일이었다. 오후 3시에 수술실에 들어가서 밤 12시경에 수술실에서 깨어났다. 보통 은 회복실이나 중환자실에서 깨어나는데 예상보다 늦어졌고 더구나 의료 진이 늦은 시간에 마취를 더 하기에는 애매한 상황이었는지 수술실에서 나를 깨웠다. 9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 밖에서는 아내가 기다리고 있 었다. 오랜 시간 수술실 밖에서 나를 지켜준 아내에게 감사한 마음이 절 로 일어났다. 마취에서 깨고 나니 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원래 수술을 마치고 나면 이렇게 통증이 심하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술 침대를 끌고 가던 아내가 의료진에게"옆에 약 병에서 호수가 빠져서 약이 새고 있는데 괜 찮은가요?"하고 물어 보았다. 알고 보니 그 약은 마취에서 깨어났을 때 극심한 통증을 줄여 주는 진통제였던 것이다. 그 약은 마약성분이기 때문 에 아무나 함부로 가져올 수 있는 약이 아니며 반드시 마취과 의사의 처 방이 있어야만 갖고 올 수 있던 약이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에 약을 처 방해주는 의사가 나를 위해서 기다리고 있지는 않았다. 그런 상황에 놓이 자 말로 형언할 수 없는 통증이 나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골반 안쪽의 예민한 부분을 절개하여 암을 제거하는 수술이었는데 마 취가 사라지면서 진통제 없이 온전히 그 통증을 참아야만 하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되는 이 경험이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드 는 결과가 되었다. 그 고통을 마취제의 도움 없이 온전히 마주하면서 나 는 처음으로 투병하며 또 살아하며 생기는 여러 문제들이 사소하게 느껴 졌다. 그리고 그 통증을 이겨내면서 이것들은 나를 괴롭히는 일들이 아니 라는 것과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이라는 용기를 갖게 되었다. 20일 정도 입원하면서 몸은 차츰 회복되었다. 몸이 조금 살만해지니까 담당 의사는 또 다시 항암치료를 권유했다. 그때 나의 머릿속에는 많은 고민이 있었다. 병원에서 시키는 일들을 모범생처럼 잘한다고 해서 암이 나을 것이란 확신도 증거도 없는데 지금까지 암을 치료한답시고 나의 몸 을 너무나 망가뜨려 왔음을 알게 되었다. 지난 몇 달 동안 방사선치료를 33번이나 하였고, 장시간에 걸친 수술로 나의 몸과 마음은 지칠 데로 지 쳐 있었는데 또 다시 항암치료를 하자는 것이다. 키는 183Cm에 몸무게는 100Kg이 넘었지만 지금은 몸무게가 70Kg을 조금 넘고 있다. 무려 30Kg이 넘게 살이 빠졌으며 암이 아니라 병원에서 진행하는 치료 때문에 몸이 망가져가고 있었다. 병원의 암치료가 암을 잡 는 게 아니고 사람을 잡는구나 라는 회의감에 젖었다. 결국 나는 의사의 항 암치료를 거부했다. 암을 치료하면서 의사 말을 거부하기는 처음이었다. 다리가 제대로 굽혀지지 않아서 걷기도 불편했고 혼자서는 양말 한짝 도 신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아이처럼 기저귀를 차고 생활을 해야 했고 골반 안쪽의 암세포를 제거하면서 많은 신경을 건드렸기 때문에 집사람 에게 남자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아직 어린 자식들, 늙으신 홀어머니, 가족들의 얼굴이 차례로 떠올랐다. 처음 암 진단을 받 았을 때 집사람이 했던 말이 퍼뜩 생각났다. '이제 올 것이 온 거야! 그 동안의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고 열심히 교회에 다니라는 하나님의 뜻이야!' 나의 직장은 양주를 수입하고 유통하는 회사다. 이 회사를 10년 넘게 다녔는데 술을 유통하는 회사다 보니 자연스럽게 음주하는 양이 남들보 다는 많았다. 어떤 날은 낮에도 접대를 위해서 양주를 마시곤 했으며 거 의 매일을 술과 함께 지내야했다. 또, 내가 술을 좋아하기도 했다. 그런 남편의 모습을 바라보는 집사람은 직장의 일이라서 말리지도 못하고 속 이 많이 탔을 것이다. 종교는 암이 재발하고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섰을 때 나에게 유일한 마음 의 위안이었다. 암환자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죽음이 아닐까? 스스로가 죽음에 대해서 제대로 된 정립을 세우지 않으면 암을 이길 수 없다는 구 절을 책에 보았다. 맞는 말이다. 암 자체가 나에게 악영향을 주는 것은 아 무 것도 없었다. 암이 통증을 만드는 것도 아니고 외모에 영향을 준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나의 몸에 암이 다시 재발하였다는 소식은 나에게 죽음 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암은 곧 죽음이며, 내가 두려워하는 것은 암이 아 니라 죽는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람이 죽지만 그런 죽음을 직면하였을 때 생기는 두려움이 무서 웠다. 그러나 이제 그런 두려움을 내려놓았다. 두려움 뿐만 아니라 살아 가면서 생기는 모든 문제들을 내려놓았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으며 몸도 서서히 회복되고 좋아지고 있다. 그런 면에서 종교는 나에게 큰 힘이었으 며 희망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아버님이 돌아가셨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기 때문에 아버지 없이 성장하는 고통을 잘 알고 있다. 암을 통해 죽음을 마주하면서 나는 어렸을 때 돌아가신 아버지의 참담한 마음을 알 게 되었다. 아직 열 살도 되지 않은 어린 딸과 아들을 보면서 행여 내가 아 이들에게 그런 상처를 주는 것은 아닐까 늘 두려웠다. 더구나 어머님께서 충격을 받으실까봐 차마 재발에 대한 얘기는 감추고 있었기에 누님과 집 사람은 병원에서 퇴원하면 집으로 가지 말고 요양 시설에서 좀 쉬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여러 곳의 요양 시설과 근처에서 이름 있다고 하는 요양원을 방 문하여 알아보고 있었다. 마지막 결정은 나의 몫이기 때문에 가족이 들려 주는 정보를 갖고 결정해야 했다. 암환자를 위한 대부분의 요양시설은 주 변 환경이 좋았지만 선뜻 신뢰가 가지 않았고 더구나 시설 면에서는 낙후 되어 있는 곳도 많았다. 많은 고민 끝에 해운대 달맞이 고개에 있는 마더 즈힐링센터를 선택했다. 처음 왔을 때는 그저 쉬기 위해서 왔을 뿐이었 다.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은 새로 생긴 곳이다 보니 다른 요양원에 비해서 시설이 좋았다. 그때문에 이곳을 선택하였다. 니시요법이나 그런 것은 몰 랐지만 암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과'이런 게 무슨 도움이 되겠어? 하 는 생각이 반반이었다.
처음 이곳에 와서 풍욕, 냉온욕 등 니시요법을 알려 주는 대로 했다. 아 침에 일어나서 풍욕을 하면서도'이런 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이런 걸로 어떻게 암을 고치나'하는 의구심이 들었지만 그리 어렵지도 않고 힘든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따라했다. 그렇게 2주 정도의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는 깜짝 놀랐다. 무릎이 굽어지지 않아서 양말조차 혼자 신기 어 려웠는데 무릎이 자연스럽게 접어졌다. 더 놀란 사실은 의사가 앞으로 성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는데 어느 날 아침 일어나 보니 발기가 되 었다.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니시요법을 하면서 불과 며칠 사이 에 일어난 일들이 나에게 확신을 주었다.
'암도 나을 수 있겠구나!'
니시요법을 하면서 많은 사실을 깨달았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다. 이렇게 힘든 암 투병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려고 하는 메시지는 무엇인가. 그리고 암을 낫게 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의료 시스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풍욕이나 냉온욕 같은 아주 간단한 방법이 진 리구나 하는 생각들이다. 내가 재발할 당시에 뉴스에서 자주 보도된 내용 중에 하나가 성폭행범 을 잡았다는 소식이었다. 그자는 밤늦은 시간 원룸에 혼자 사는 여성들만 골라서 범죄를 저질러왔고 오랜 기간 동안 아주 많은 피해자들이 생겼다. 더구나 감옥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계속해서 범죄를 저지르는 악질이 었으며 감옥을 자주 드나들던 사람이었다. 그 뉴스를 보면서 지금의 내 상황과 나를 괴롭히는 암이 대입되었다. 나는 암이라는 놈을 무조건 나쁘다고 해서 감옥으로 보냈다. 방사선이나 항암주사 같은 방법을 동원하여 감옥에 가두는 것이다. 그런데 항암치료 나 방사선이 끝나면 암은 또다시 활개를 치고 내 몸을 망가뜨리는 더 큰 범죄를 저지른다. 계속 되풀이되는 이 악순환을 떠올리면서 나는 어쩌면 암이 내게 자신을 알아달라고 소리친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절한 비유가 아닐 수도 있지만 당시 내게는 큰 울림으로 암의 외침을 온몸으로 느꼈 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저주했던 내 몸 속의 암을 끌어안고 울었다. 암을 치료하면서 만난 의사들은 모두 존경할 만한 분들이었다. 나름대 로의 철학과 원칙을 정해서 암환자를 진료하고 치료하였다. 그러나 병원 시스템은 환자를 위한 시스템이 아니었다. 한마디로 은행이다. 번호표를 뽑아서 기다리고 정해진 치료를 받고 돈만 받으면 되는 시스템이다. 또 나는 VIP고객이 될 수 있었다. 담당의사는 먹는 항암약을 평생 먹으라고 했기 때문인데,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서 생각해보니 병원 시스템이 정말 로 무섭게 느껴졌다. 건강해지고 있다. 몇 년 동안 암치료를 겪으면서 나의 심정과 주변에 많은 변화가 생겼다. 또 국내의 암치료법은 명백하게 잘못되어 있다는 사 실을 몸소 체험하였다. 휴직 중인 직장에 다시 복귀할지는 모르겠지만 앞 으로의 삶은 이전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동안 나의 인생은 온 전히 나의 것이 아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앞만 보고 일만 하면서 살아왔 지만 누구도 나의 인생을 대신할 수 없다. 아마도 암은 나에게 이런 메시 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찾아온 것은 아닐까. |